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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메타어스] 트럼프의 탄소 역주행과 우리의 갈림길 (한겨레, 2025. 03. 09.)
김형준 |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백악관에 다시 입성하며 기후 정책이 급변하고 있다. 2017년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했던 트럼프는 2025년 재집권 뒤 유사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화석연료 중심의 정책으로 회귀하면서 국립과학재단(NSF), 해양기상청(NOAA) 등 주요 과학기관의 대규모 예산 삭감과 해고를 밀어붙이고 있다. 세계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1.5도 목표 달성이 어려운 상황에서, 세계 최대의 경제국이자 누적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의 기후 후퇴는 글로벌 기후 대응을 커다란 혼란과 불확실성 속에 빠뜨렸다. 인류의 기후 미래가 불투명한 지금, ‘지속가능한 발전’(SSP1)과 ‘화석연료 기반 발전’(SSP5) 시나리오는 의미심장한 갈림길로 다가온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국제 협력을 바탕으로 친환경 기술 혁신과 적극적 기후정책 추진을 강조하는 기후 변화 시나리오이다. 반면 ‘화석연료 기반 발전’은 고성장을 위해 화석연료에 적극적으로 의존하지만, 기술 발전에 힘입어 기후 변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현재 추진 중인 정책들은 미국을 ‘화석연료 기반 발전’ 시나리오와 비슷한 방향으로 끌어간다. 단기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높고 생활 수준이 개선될 수 있으나, 중장기적으로 심각한 기후 피해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동시에 인도, 중동 산유국 등 경제 성장을 우선하는 국가들에 기후정책 완화의 명분을 부여해 세계적 기후 후퇴를 부를 가능성도 크다. 미국의 탄소 역주행은 단기적으로 ‘화석연료 기반 발전’ 시나리오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지만 글로벌 흐름을 완전히 전환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세계 경제와 사회 시스템이 이미 ‘지속가능한 발전’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어서다. 특히,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도입함으로써 기후 대응을 경제 문제와 직접 연결하고 있다. 환경 규제가 느슨한 국가에서 생산된 탄소 집약적 상품이 유럽연합 시장으로 들어오는 ‘탄소 누출’이 발생할 때, 권내 생산 제품과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탄소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로 ‘지속가능한 발전’ 시나리오 실현을 위한 핵심 장치 중 하나다. 중국 역시 2060년 탄소중립 목표를 설정하며 친환경 기술 리더십을 공고히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지속가능한 발전’과 ‘화석연료 기반 발전’이 혼재된 모습을 보인다. 친환경 기술 투자를 늘리며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산업 구조 전환을 서두르고 있으나 여전히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이자 석탄 소비국이며 석탄 발전 등 고탄소 기반시설 확대가 뚜렷하다. 그러나 미국의 탄소 역주행이 장기화할 경우, ‘지속가능한 발전’ 전환을 보다 적극적으로 가속할 가능성이 크다. 친환경 산업을 글로벌 경쟁력 확보의 핵심으로 보고 있고, 국제 사회에서 기후 외교 리더십을 확보하려는 전략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 갈림길에서 수출 중심 경제구조를 가진 우리나라가 ‘화석연료 기반 발전’을 고집한다면 글로벌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요구가 강화하고 있는 세계적 추세를 봤을 때 중장기적 위험 부담이 크게 증폭할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정책 후퇴를 명분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의 전략적 선택을 강화해야 한다. 배터리, 수소 등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재생에너지 투자 위축은 우리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높일 기회다. ‘미국의 외교 공백’에서 중견국 외교를 강화해 유럽연합, 중국과 함께 국제 기후협력을 주도해 갈 수도 있다. 지금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더 큰 기회이다. 미국의 빈자리를 메우고 글로벌 지속가능 발전과 기후 대응 전략을 선도할 수 있는 그린 게임 체인저(green game changer)의 기회가 우리 손에 주어졌다. 기사 원문 바로가기
  • 작성일2025.03.09.
[박경렬의 미래를 묻다] “국제협력 확대” 혼란 빠진 과학기술 현장 (중앙일보, 2023.07.31.)
“오래전 만난 외국 학자에게 국제협력을 할 여지가 있는지 급히 문의했다.” “작년 뉴욕에서의 ‘디지털 자유선언’, 지난달 ‘파리 이니셔티브’와 같은 대통령의 ‘말씀 내용’을 참고해 예산 수정안을 하루 만에 제출해야 했다.” 연구현장이 혼란스럽다. 지난달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R&D 이권 카르텔 타파’와 함께 ‘과학기술 국제협력의 대폭 확대’를 지시한 이후 시작된 일이다. 대통령이 국제 공동연구와 글로벌 과학기술 협력, 엄정한 연구개발을 직접 지시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정부는 과학기술 국제협력을 겉으로는 강조했지만 정작 국제공동연구는 해마다 감소해왔다. “R&D 카르텔 타파”와 함께 지적방향 맞지만 방식·시점이 문제예산삭감, 졸속집행 등 우려돼연구현장 자율성 훼손 말아야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과기정책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달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2023년 국가재정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정부 R&D 예산 중 국제공동연구의 비율은 현재 1~2%대. 우리의 변화된 과학기술 위상을 고려하면 주요 선진국보다 매우 낮은 수준이다. 과학기술혁신 체계의 질적인 전환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과학기술 국제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한다.그러나 방식과 시점이 문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당장 내년 R&D 예산안이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5개 출연연구기관의 주요 사업 예산이 20% 가까이 삭감되고, 국제협력은 증액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다. 불과 몇 주밖에 남지 않은 예산기간 동안 R&D 예산은 졸속으로 기획될 수밖에 없었다.무엇이 문제일까. 우선 과학기술정책의 수립과정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R&D 예산을 전면 재검토하고 성과를 높이려면 데이터에 근거해 원칙과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응용연구는 투자 대비 효과성을 높이고, 기초연구는 인내를 가지고 장기적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정교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카르텔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구조적인 개혁을 해야 할 것이다.과학기술계 전체를 통틀어 문제 삼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국제협력을 대폭 확대한다면 어느 분야에서 기술주권을 지킬 것이고 협력은 누구와 어떻게 할 것인지 명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R&D 예산의 급격한 삭감, 준비되지 않은 예산 편성은 부메랑이 되어 필요한 기초연구를 위축시키고 현장의 연구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급격한 양적 성장이 반드시 질적 변화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과학기술 국제협력의 핵심은 상호성과 신뢰 구축이다. 1대1 매칭펀드를 통한 협력기관의 책임과 기여가 우리의 의지만큼 중요하다. 서로 관심 있는 연구 아젠다를 발굴하고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양해각서(MOU)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고 국제협력이 되지 않는다.명확한 원칙, 구체적 전략 없어더군다나 우리가 지금 급히 예산을 늘려도 대부분의 협력국 예산 프로세스에서는 반영될 수 없다. 영국, 일본 (4월), 미국(10월) 등 국가별로 회계연도가 다른 점은 사전 조율이 매우 중요한 국제협력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미국도 국립과학재단이 이미 국회에 2024년 예산안을 제출했다.누구와 어떠한 협력을 하겠다는 것인가? 우수한 국내 연구자들이 해외 연구자들에게 협력을 목매는 상황이 되어서도 시간에 쫓겨 예산을 만드느라 후순위 파트너를 찾는 해프닝이 연출되어서도 안 된다. ‘연구를 위한 협력’이 아닌 ‘협력을 위한 연구’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맞이해, 내년 말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예산이 부족하고 ‘불용’ 예산이 많이 늘어날 수 있다. 소중한 혈세가 내실 있게 사용되려면 명확한 원칙과 세부적인 전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분야별, 협력국의 기술 발전 단계별, 요소별 기술성숙도(TRL·Technology Readiness Level)를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세 가지가 중요하다. 먼저 해외 최우수 연구진과의 협력은 국가전략기술을 대상으로 하되 기술주권과 지적재산권을 강화하는 대원칙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기술사업화와 실용화를 위한 협력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포괄하는 범위 설정과 시장과의 연계가 필요하다. 기술 표준에 대한 전략도 함께 수반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난제에 대한 양자협력은 현재 정부의 중점협력국과 연계하고,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등 기술이전의 무대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다자협력도 중요하다.과학기술 국제협력의 또 다른 목표는 인재유치다. 궁극적으로는 해외 우수 연구자들에게 국내 연구기관과 대학이 매력적인 근무와 협력의 공간이 되고 우리의 혁신역량이 지속해서 강화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과학기술 컨트롤타워 있나이를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국가 차원의 통합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연구현장에 혼란을 일으키는 과학기술 컨트롤타워가 어디인가. 현재 정부 내에서는 과학기술 국제협력, 더 큰 틀에서는 과학기술외교를 추진하는 범부처 체계가 없어 통합적 거버넌스 구축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현장과의 소통을 통해 제도 정비도 선행되어야 한다.그동안 주요 규정은 법적 근거가 취약한 채 일회성, 단일 부처 중심으로 수립됐다. 국제과학기술협력규정과 출연연의 내부규정 등에 파편화돼 있다. 더구나 2021년 시행된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은 연구과제 수행 주체를 국내기관으로 한정하고 있다. 국제공동연구의 확대를 위해서는 혁신법부터 수정이 필요하다.과학기술은 국가 간 경쟁의 핵심이자 국제협력에도 중요한 매개다. 국가 과학기술전략의 본질은 이런 과학기술의 복합성을 관리하며 통합적인 비전과 철학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큰 전환점에 서 있다. 안으로는 과학기술혁신 생태계를 발전시키고 기술주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밖으로는 국제협력을 통해 우리의 위상을 강화하는 노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박경렬 KAIST 과학기술 정책대학원 교수 기사 원문 바로가기
  • 작성일2023.07.31.
[박경렬의 미래를 묻다] 우리는 AI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중앙일보, 2023.03.13.)
산이 바다를 사랑할 리는 없다. 그래도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는 이육사의 시 ‘광야(曠野)’의 구절만큼 독립에 대한 절절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인격이 없는 무생물에 감정과 의식을 부여하는 의인화는 예술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한다. 과학적 발견과 기술 혁신에도 상상력은 중요하다. 인공지능(AI)은 자아가 있을까. 자기복제의 욕구는 있을까. 인류를 지배하지는 않을까. 도발적인 질문에 과학기술의 상상력은 열려 있어야 한다.하지만 AI에 대한 과도한 의인화는 위험하다. 검색 엔진에서 AI의 이미지를 찾으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눈·코·입을 갖춘 사람의 모습에 뇌 부분은 열려 있어 전기회로를 형상화한 이미지가 보인다. 2018년 AI 로봇 소피아(Sophia)와의 대담이 한국에서 열렸다. 한복을 입혀 놓은 소피아에게 사회자는 자신과 비교하며 누가 예쁜지를 물었다. “누구나 아름다운 존재이며 비교할 수 없다”는 답은 이미 디지털 공간 어딘가에 인간이 기록했을 법한 ‘데이터’다. 그렇기에 대담자의 환호와 과도한 해석은 불편했다.언어와 이미지는 인간의 사유를 규정하기에 우리는 기계학습 모델이라는 AI의 본질을 계속 의식해야 한다. 공포심 키우는 과도한 의인화왜곡·허위정보 양산이 더 걱정AI 본질은 결국 기계학습일 뿐윤리 기반 디지털 역량 길러야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 2018년 1월 서울에서 열린 ‘4차 산업 혁명, 소피아에게 묻다’ 콘퍼런스에서 인공지능(AI) 로봇 ‘소피아’가 사회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1년 혐오 표현으로 논란이 된 챗봇 ‘이루다’ 사태의 본질도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 : GIGO)’는 정보시스템 분야에서 익히 알려진 데이터 편향이었다. AI는 사회라는 데이터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논란은 신뢰할 수 있는 AI 개발과 우리 사회의 차별·혐오를 개선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했다.AI에 대한 과도한 의인화는 기계가 인간처럼 자의식을 가지고 인류를 지배할지 모른다는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준다. AI의 자기복제 능력에 대한 질문에 답은 간단하다. 생물학적 생식과 발생의 과정을 유기체가 아닌 기계 혹은 알고리즘이 가질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짜뉴스와 오염된 ‘밈(meme)’일 것이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리스어 mimeme(모방)과 gene(유전자)을 합성해 ‘밈’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문화나 가치가 시간을 흘러 전파되는 것을 설명했다.인간의 의도를 가진 AI가 생성한 밈이 허위정보 확산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된 사례는 많다. 백신의 과학성에 대한 왜곡, 적대국 댓글 조작 및 사이버 여론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딥 페이크’ 물(物)의 살포 등이다. 인류가 쌓아온 가치·규범·윤리를 위협하는 상황을 어떻게 공동 관리할지가 막연한 AI의 위협에 대한 걱정보다 중요하다.‘인간 대 기계’ 아닌 ‘인간과 인간’ 문제인간과 기계를 대척점에 세우는 세계관은 기술혁신으로 다양한 경계가 허물어지고 복합화되는 것을 담지 못한다.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선택적 데이터를 학습시킨 AI 뒤편 실재 인간의 존재도 잊게 한다. AI 윤리와 정책의 쟁점은 AI 자체의 권리나 규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다. 인간과 기계가 아닌 결국 인간과 인간의 문제다.작년에 타계한 프랑스의 사상가 브뤼노 라투르는 인간-기계의 이분법적 관계를 타파하고자 했다. 그는 “살인을 하는 것은 총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총을 든 사람 즉 인간-기계의 하이브리드(혼종)”라고 표현했다. 필자가 공부하던 정보시스템학과 석좌교수로 있던 그는 부르고뉴 지방 와이너리 가문 자제답게 학생들의 설익은 질문에도 항상 잘 익은 풍미의 와인과 같은 영감을 주었다. 인간-기계의 상호작용이 초개인화되고 있는 AI 분야에도 함의를 준다.포용적인 AI 기술 개발 나서야우주개발·원자력과 같은 ‘거대과학’에 비해 AI 산업은 일반 사용자가 제품 개발에 데이터를 제공하고 윤리 가이드라인 제정에 참여해야 할 공간이 크다. 결국 ‘디지털 시민’의 역량을 어떻게 발전시킬지의 문제다.작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 뉴욕대에서 디지털 자유 시민을 위한 ‘뉴욕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정부는 ‘디지털 전략’으로 디지털 역량, 경제, 플랫폼 정부, 혁신 문화, 포용 사회의 5개 세부 계획을 수립하였다. 선언은 좋으나 다음의 세 가지 후속방안이 필요하다. 첫째, 포용성 논의를 넘은 보편적 디지털 사회의 구현이다. 기술 혁신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아야 한다. 논의 중인 ‘디지털 권리장전’과 ‘디지털 사회 기본법’이 다양한 이해 당사자의 참여를 거쳐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다.둘째, 디지털 시민교육이다. ‘100만 디지털 인재 양성’, ‘코딩 교육 2배 확대’라는 읽기 좋은 슬로건만 넘쳐날 뿐 경쟁력을 갖춘 데이터 및 디지털 인력을 키우는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폭력과 개인정보 침해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디지털 감시, 알고리즘의 편향성에 대해 비판하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을 정규 과정화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공존의 윤리를 바탕으로 디지털 참여 역량을 기르는 것은 미래 세대부터 고령층까지 모든 연령대에서 필요하다.마지막으로 글로벌 연대의 필요성이다. 정부의 권위성과 비민주성을 강화하지 않는 디지털 전환은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핵심이다. 우리 정부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작년 뉴욕대(NYU) 디지털비전포럼의 후속 조치로 카이스트(KAIST)와 NYU는 보다 포용적인 AI 기술 개발과 디지털 거버넌스를 연구하는 협력센터를 출범하였다. 이 작은 움직임이 디지털 자유의 논의를 세계 시민과 공유하자는 뉴욕 구상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하리라 내다본다.박경렬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기사 원문 바로가
  • 작성일2023.03.13.
[박경렬의 미래를 묻다] 과학기술의 본질은 협력…미·중 갈등 이분법 넘어서야 (중앙일보, 2023.02.13.)
갈수록 거세지는 기술패권 경쟁 ‘부루마블’. 유년 시절 친구들과 둘러앉아 했던 추억의 보드게임이지만, 그 이름이 무슨 뜻인지는 정작 몰랐었다. 전 세계 도시의 부동산을 구매하고 체류비를 받아 상대를 파산시키기 위해 무한경쟁을 펼치는 승자독식 게임. 그 이름의 유래가 우주 속 우리의 지구를 뜻하는 ‘푸른 구슬 (Blue Marble)’인줄 알았다면 서로 덜 경쟁적이었을까. ‘블루마블’은 1972년 달을 관측하러 갔던 아폴로 17호가 2만9000㎞ 상공에서 우연히 찍은 사진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속에는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의 공간에 홀로 위태롭게 떠 있는 창백한 푸른 별. 지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1970년대 환경운동이 남긴 것 인류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을 맞는다. 땅에서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다가 우주에서 유한한 지구를 보게 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이 정점으로 치달은 때 한계 상황의 지구를 인식하게 해주었다. 인류는 경쟁적으로 달을 향해 갔지만 결국 협력이 절실한 우리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1970년대 환경 운동과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국제협력은 이렇게 촉발되었다. 1972년 각국의 과학자·지식인이 모인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1992년 리우 지구환경정상회의로 계승된다. ‘행성성(planetarity)’을 일깨워 준 블루마블이 지속가능 발전의 역사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다. 전 지구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2023년 현재 우리는 훨씬 위태로운 상황에서 더 암울한 미래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걱정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미·중 대치에 과기교류 위축 양상안보 중심의 편가르기 도움 안돼기후·빈곤 등 인류 앞의 숱한 난제전 지구 차원의 다각적 접근 필수기술주권과 국제연구 모두 중요한국도 산업·지역별 전략 나눠야 안타깝게도 최근 기술패권 갈등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국가 간 과학기술협력의 공간은 점차 좁아지고 있는 모양새다.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며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급속한 성장을 바탕으로 기술 권위주의의 팽창을 도모하고, 미국은 대(對)중국 수출 및 인적교류 통제로 맞서고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우리도 선택을 강요받는다. 협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술동맹 내로 한정되거나 순진한 상상으로 치부된다.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는 우방국과 안보·경제적 이익 모두를 도모해야 함은 중요하다. 하지만 과학기술 정책에서 모든 담론이 패권경쟁 구도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우려스럽다. 현장 연구자들은 중·러 학계와의 교류로 있을 혹시 모를 제재에 걱정한다. 고도성장기 과학기술을 경제의 수단으로만 보았다면 이제 모든 사안을 안보의 관점으로 편가르기 하는 분위기에 있다. 우리의 경제·안보이익 잘 따져야 과학기술을 이분법적 대결과 안보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단순하며 위험하다. 최근 기술패권 경쟁은 매우 다차원적이기에 그렇다. 경쟁에서 기술 우위를 확보하며 승리를 지향해야 할 분야와 협력을 추구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과 연구혁신 네트워크에서 한국의 위치는 12대 전략기술 중에서도 반도체·이차전지·수소·탄소중립기술 모두 다르다. 미·중 이분법에만 과도하게 주목하면 우리의 경제안보적 이익을 섬세하게 고려할 개별기술 및 산업별·지역별 대응 전략을 놓칠 수 있다.기술규범의 전선 또한 다층적이다. 기후기술, 자율살상무기체계(LAWS)와 관련된 논의는 미·중, 미·러의 단순한 전선이 아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첨예한 대립이다. 데이터 주권에서도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으로 인해 EU와 미국의 갈등이 있은 지 오래다. 글로벌 기술 거버넌스에서 과학기술계·산업계를 포함하여 협력을 다차원적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다.기술패권과 갈등의 시대에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협력해야 할까. 과학기술을 통한 협력에는 우리가 ‘배우는’ 협력, ‘나누는’ 협력, ‘모두가 함께하는’ 협력이 있을 것이다. 배우는 협력은 최첨단 과학기술 연구를 위한 기초과학협력, 국제공동연구이다. 기술갈등 속에도 국제공동연구와 민간교류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UC샌디에이고 연구진은 미·중 패권경쟁으로 인해 미국 생명과학자의 연구생산성이 전반적으로 감소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워싱턴도 원하던 바가 아니다. 미국국립과학재단은 팬데믹 전 과학기술연구의 23%가 국제협력으로 가능했다고 밝혔다.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공조패권경쟁의 시기 과학기술협력은 축소되어야 할까.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도 핵심기술과 인권침해기술 분야의 위험을 관리하며 언제, 어떻게 과학기술협력을 진행할지 고민하고 있다. 지난해 말 MIT가 발간한 ‘대학에서의 중국 협력’ 보고서는 선택적인 협력의 실마리를 제공한다.EU도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과학기술협력을 주도하는 전략적 접근을 택했다. 한·미·중·러 등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공동연구도 기술갈등이 첨예했던 냉전기에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기술주권을 지키는 동시에 연구협력과 인재교류를 활성화하는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나누는 협력은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한 기술이전과 및 양자협력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역량을 높여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국격을 제고하고 우방을 확보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다. 높은 국격이 국익이다. 닮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것은 인구절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한국에 해외 인재를 유치하여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산업과 연구생태계에도 기여할 것이다.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에도 과학기술협력이 천명된 만큼 세부적인 이행계획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글로벌 협력은 생존의 문제함께하는 협력은 왜 필요한가. 과학기술은 지정학을 넘어서야 한다. 기후위기·재난·질병·빈곤퇴치에 대응하는 글로벌 과학기술협력은 우리에겐 생존의 문제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하스는 공통의 비전을 가진 각국의 과학기술자, 전문가 네트워크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공동체(epistemic community)로 설명했다.1987년 채택된 ‘오존층 파괴물질에 관한 몬트리올 의정서’는 UC어바인 연구진을 포함한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설득의 결과물이다. 진실을 규명하고 힘의 논리에 굴하지 않는 과학기술인의 노력이 있었기에 공동 대응이 가능했다. 협력의 열매는 오존층이 뚜렷하게 회복되고 있다는 작년 10월 ‘오존층 감소에 대한 과학적 평가’ 보고서로 확인되었다.글로벌 복합위기를 해결하는 데 과학기술협력의 중요성이 한층 커지고 있다. 네이처는 2011년부터 선정해온 ‘올해의 과학기술인’에 안토니오 구테헤스 유엔사무총장을 비롯해 정책 전문가(2명), 기후변화 전문가(3명), 국제보건학자(3명)를 선정하였다. 과학적 발견과 기술개발에만 초점을 맞췄던 과거와 달리 점차 과학기술의 전 지구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기술경쟁의 시대에도 국제사회는 기후기술의 개발을 위한 공동 노력과 기술이전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지난해 말 이집트에서 열린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7)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개발도상국 연합인 77그룹(G-77)이 상정한 소외 국가를 위한 금융과 기술지원이었다. ‘손실과 피해’를 보상하는 기금 설립과 기술이전에 극적인 합의를 도출했다. 아직 구체적이지 않은 이 합의가 갈 길은 멀지만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과학기술협력의 공간을 마련했다.한국이 과기협력 리더십 발휘해야기술패권의 시대, 우리에겐 오히려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협력을 주도하는 것이 새롭게 갈 길이다. 이것은 순진하고 이상적인 외침이 아니라 전략이고 현실이다. 부루마블 게임은 승자독식으로 끝나지만, 현실의 ‘블루마블’은 한판 승부가 아니다.국가전략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을 바라볼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과학기술의 이중성에 있다. 과학기술은 본질적으로 경쟁의 요소이지만 인류의 난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협력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경쟁과 협력의 이분법을 넘어 포괄적인 국가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한국의 과학기술 역량과 산업화의 역사는 세계가 주목한다. 그동안 우리의 역량에 비해 부처를 넘어서는 과학기술 외교와 협력의 철학을 정립하고 직접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데는 부족했다. 갈등의 시기 한국이 과학기술협력 의제를 선도적으로 발굴하고 다양한 민간협력과 양자, 다자협력의 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국제협력과 다자외교를 주도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정부의 글로벌 중추국가 비전에도 상응하는 길이다.◆박경렬=서울대에서 화학생물공학과 외교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정책학 석사, 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정보시스템과 혁신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현장에서 근무하였고 세계은행 이노베이션 랩을 거쳐 KAIST에 부임하였다. 공학과 사회과학, 이론과 실천, 한반도와 글로벌 사회의 경계인을 꿈꾼다. 기사 원문 바로가기
  • 작성일2023.02.13.